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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식 칼럼] 영화 ‘노량’이 소환한 충무공 죽음의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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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3. 12. 21. 17:42

주은식 사진
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
최근 충무공 3대 해전에 속하는 '노량'에서 충무공이 순국하면서 '전방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대사를 인용했다. 충무공이 노량에서 돌아가신 사실을 역사에서는 전통 전사설이라 한다. KBS방송에서도 다루었지만 충무공 죽음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충무공이 과연 현장에서 순국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많은 정황이 존재한다. 강단의 역사학자들은 황당한 소리 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남천우 서울대 교수가 쓴 책 "충무공은 전사하지 않았다"의 주장 내용을 보아도 그런 의문이 든다.

첫째, 23전 23승(작은 전투까지 합하면 36전 36승)까지 한 용병과 작전 전문가가 갑옷을 벗고 대적할 리가 없다. 당시 정치적 상황은 충무공을 정치적으로 후원했던 서애 유성룡이 파직을 당해 귀향을 했다. 충무공은 완전 고립된 상황이었다. 살아도 전후 어떤 봉변을 당할지 근심이 가득했다.

둘째, 충무공이 치른 전투는 대부분 낮에 이루어졌는데 유일하게 노량해전은 야간에 이루어졌다. 야간전투 시 조선군의 장점인 총통을 쏘는데 사거리 측정이 제한되었다. 왜 야간전투를 해야 했을까? 당시 조선 수군은 탈출하려는 고니시군과 이를 엄호하려는 시마즈군 등 양면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 절박함도 있기는 하였다.

셋째,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사는 오늘날 해군 참모총장과 해군작전사령관을 겸한 정도의 직위였다. 기함인 그 주위에 부하 장수는 독전관 송희립을 제외하고 한 명도 없었다. 이것은 부하들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충무공의 사전 배려로 보인다. 실제로 충무공 부하들 중 서거 후 정치적 책임을 진 사람은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충무공의 현재 산소는 순국했다는 시점에서 81일 후인 1599년 2월 장사를 치르고 16년 후에 이장을 하였다. 처음 쓴 음봉산에서 현재의 어라산으로 이장을 한 것이다. 부인 상주 방씨와 합장을 위한 이장도 아니었다.
◇충무공 산소, 순국 16년 후 별다른 이유 없이 이장

충무공이 순국한 당시 세수가 54세였다.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충무공은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살아남는다 해도 조정의 상황을 보면 자기가 살아날 구멍은 없었다. 전공보고를 트집 잡아 투옥하고 백의종군을 시켰던 선조였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죽음을 가장했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생몰연대를 보면 그런 의문이 든다.

명나라 장수 등자룡이 죽었다고 선조가 국장을 선포하는 바람에 고금도 유허지에서 달구지에 시신을 아산까지 이동해 왔지만 장사를 치를 수가 없어 다시 고금도로 돌아왔다. 아마 냉장 시설이 없었던 당시엔 소금으로 시신 부패 방지를 했던 듯하다. 그래서 고금도 유허지엔 한동안 풀이 돋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소금으로 방부 처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16년 후 실제 돌아가시어 장사를 지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죽거나 은거하지 않으면 선조는 충무공 이순신을 전쟁영웅으로 대접할 입장이 아니었다.

왜 그런 상황이 되었을까? 자신은 백성을 버렸고 충무공은 구국의 영웅이었다. 본은 다르지만 같은 이씨였다. 역성혁명도 아닐 터이고 백성이 옹립하면 그뿐이었다. 선조실록을 보면 선조는 충무공의 공훈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다. 인정하면 자신이 초라해지니 조선수군이 아닌 명나라의 원병으로 나라를 구했다고 하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였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말아먹었던 원균과 같은 반열에 두었다는 것은 선조의 입장이 궁색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충무공에 대하여 너무 야박했다. 충무라는 시호도 이순신 순국 45년이 지난 인조 때 택풍당 이식이 시호를 내려달라고 간청을 해서 겨우 받았다. 충무공은 선조를 부끄럽게 만든 장수였다. 그래서 선조는 임진란이 끝나고 공신록을 만들 때 이순신을 최초 선무 2등 공신에 책정했다가 나중에 신하들의 건의로 1등으로 정정했다.

◇충무공 전공 인정에 인색했던 선조

선조는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적과 맞붙어 싸운 장수보다 도망가는 데 따라간 내시를 더 많이 챙겼다. 선조가 책정한 공신은 도망갈 때 졸졸 따라간 호성(扈聖)공신 86명,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거나 명에 원군을 요청한 공신으로 18명, 왜란 중 발발한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청난공신 각 1, 2, 3 등급을 책정했다.

공신 책정에 6년이나 걸린 이유는 조정 대신이 결재를 올려도 재가를 하지 않았다. 선조는 몇 번에 걸쳐 결재를 미루고 시비를 걸었다. 이것은 임진왜란 극복에 가장 공이 큰 사람이 선조는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의 이름이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40자에 이르는 존호를 올리자 그때서야 재가하였다. 이게 1604년 6월 25일이었다.

선조는 10월 27일 밤 11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5시간 동안 공신을 초대하여 공신회맹제를 거행했다. 초청대상 공신이 죽었거나 참석이 불가했을 때 적장자를 불렀다.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그게 태평회맹도이다. 이 그림은 2년에 이르는 제작기간을 거쳐 1607년 2월 참석자들에게 기념품으로 지급했다.

이 회맹제에는 서애 류성룡, 영의정 이산해, 신구차(伸救箚)를 쓴 정탁, 해전에 공을 세운 이운룡 등은 불참하였다. 류성룡은 충무공이 관음포에서 순국한 날 삭탈관작이 되었고 다시 공신으로 책정되자 녹훈을 취소해 달라고 요구하고 정식으로 불참을 통보했다. 정탁도 명분은 칭병(稱病)했으나 의병을 포함시키지 않고 호성공신 위주로 책정된 것을 보고 참석하지 않았다. 이운룡은 상중이라 불참했다. 백사 이항복은 장수들의 공로에 비하면 부끄럽다고 자기를 공신록에서 빼라고 간청했다.

◇나라 위기에 상기하는 충무공, 영화 '노량' 등장도 정치적 이유?

임진왜란 후 조선은 충무공을 잊어 버렸다. 정조 때 와서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또 잊어 버렸다. 조선 말 나라가 망하려고 하자 단재 신채호가 1908년에 이순신전을 썼고 또 잊었다. 1931년 춘원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연재하기 전까지 충무공을 잊었다. 그리고 5·16 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산 현충사를 성역화하여 성웅으로 기렸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한다. "이순신의 단충(丹忠·붉은 충성심)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良將·좋은 장수)이라 한들 이에서 더 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 정유년 사이(충무공에서 원균으로)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敗沒)을 초래하여 양호지방(兩湖地方: 忠淸道·全羅道)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 사관은 충무공이 목숨을 끊었다고 평했다. 자살설이 나온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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