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강성학 칼럼] 정치인들의 역사적 유추 사용은 신중해야 한다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m3.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117010010852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1. 17. 17:42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리더십의 공부는 마치 어린 학생들처럼 모방할 모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갑자기 플루타크(Plutarch)의 <영웅전>을 뒤적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당면과제들에 대해 보다 효과적인 조망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역사에 접근해야 한다.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을 때 힘의 요소들이 무엇이고 어떻게 정당성이 형성되고 사건에 대한 국제체제의 구조적 영향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모든 지식이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부분적으로 배울 수는 있지만 그러나 철학적 영감인 직감력도 필요하다.

정치가에게는 철학적 사고와 구체적 행동이 동시에 요구된다. 철학자는 자신의 사고에 책임이 없지만 정치가는 자기 행동의 결과에 책임이 있다. 그러나 칼 야스퍼스(Karl Jaspers)가 주장했던 것처럼 정치가에겐 철학과 정치가 결합되어야 한다. 정치가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모르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자기 조국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정치가는 모두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가 서야 할 최전방에 선다. 그런 소수의 지도자는 외부적인 물리적 힘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내부적 인격으로 자신을 지배한다. 정치가는 상황의 틀 속에서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아이디어에 의해서 지도된다. 그는 계속되는 역사 속에서 일해야만 한다.

역사는 역사가의 경험이다. 그것은 바로 역사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역사서를 쓰는 것이 역사를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 에이치 카(E. H. Carr)도 역사서를 읽기 전에 그 역사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가에게도 궁극적으로 주관성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실은 영원한 신기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헤겔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산타야나(Santayana)는 과거로부터 배우지 않는 자는 그것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헤겔과 산타야나는 과거의 역사 중에서 어떤 과거를 의미하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동일한 역사로부터도 상이한 교훈을 추출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의 역사적 기록이 올바른 것인지에 관한 논란은 끝없이 계속될 수 있다.

학문의 세계로부터 세련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나 위기에 위험스러울 정도로 단순화되거나 심지어 무관한 역사적 교훈을 적용시키는 경향이 있다. 역사학자 어니스트 메이(Ernest May)는 정치 지도자들이 보통 시간을 두고 생각하거나 당면문제의 성격을 충분히 분석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그들은 떠오르는 첫 번째 역사적 유추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역사를 널리 찾아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 지도자들의 경향에는 그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역사학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역사학자는 오늘의 국가적 당면위기와 비교할 만한 성격을 가진 과거의 사례들의 연구를 통해 당면문제의 이해를 향상시킴으로써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 역사연구는 국제환경의 모든 면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는 믿음에 정치 지도자들이 빠지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는 이른바 대행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훌륭한 과거의 연구는 정치 지도자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고려해야 할 예상치 못한 결과들에 관한 일종의 확인목록(checklist)을 제공함으로써 일종의 감응 장치로서 봉사할 것이다.
그것은 물론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정책수립에 영향을 미친다는 공식적 직책에 있는 사람에게도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정부의 밖에 있는 외부인이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칠 기회는 거의 전무하다. 이뿐만 아니라 관료들은 너무나 바빠서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는 소위 핼퍼린의 법칙(Halperin's Law)이 작동한다. 고위 정책기구에 들어간 피임명자들도 신선한 아이디어에 프리미엄을 두는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바쁜 관리들은 자신의 지적 자본을 보충할 시간을 갖는 일이 드물다. 고위 관리들은 관련 부처 간의 조정, 커뮤니케이션, 및 통제활동에 자신들의 모든 시간을 소비함으로써 깊이 생각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획득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게다가 관리들은 원래 오만하여 학문연구로부터 얻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관료들은 소위 관료정치에서 승리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둔다. 이러한 관료정치의 지배하에서 정치 지도자들에게 과거의 역사연구는 당연히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관료정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1961년 이후 대통령의 안보담당 특별보좌관들이 모두 역사적 분석에 있어서 고도로 훈련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정책수립에 역사적 안목이 얼마나 중요시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실제로 정책결정자들은 정책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역사의 사용을 인정하든 안 하든 간에 자신들의 주장과는 관계없이 실제로 역사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로버트 저비스(Robert Jervis)가 적절히 설명했듯이 국가 간의 역사적 주요 사건들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것은 새로 들어오는 정보를 해석하는 이미지의 결정에 중요한 요소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가 어떤 의미에서 과거를 닮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환경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역사가들에게만 맡겨 두기에는 너무 중요하다. 특히 역사의식이 결여된 지도자나 국가는 마치 상상력의 문학세계에서 이방인으로 남아있는 사람처럼 공허하고 박탈당한 존재일 것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국가의 미래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역사는 과거와 똑같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역사가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은 동일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추를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정치인들이 스스로 역사를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으면서도 자신들의 구차한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에서 얼핏 들은 풍월로 어설프게 이런저런 역사적 실례들을 손쉽게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다.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객관적 역사를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없이 멋대로 왜곡하거나 날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해석은 분명히 다양하다. 그러나 그 다양한 해석도 역사적 연구의 결과에 근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학의 존재이유를 부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델피의 계시(the Oracle at Delphi)처럼 어떤 특수한 역사적 사건도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의 최대 도전은 정확한 역사적 유추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단 한 번의 기회를 갖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그는 자신과 자신의 조국을 상대로 단 한 번의 실험을, 아니, 국가적 도박을 하는 것이며 그에게 두 번째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온전히 그의 국민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 지도자는 역사적 유추의 사용에 있어서 아주 신중해야 할 것이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