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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조 박사의 정치경제 까톡] 포퓰리즘의 원형: 아르헨티나의 이리고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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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10. 15. 17:46

슬픈 라틴아메리카 잃어버린 100년 (5)
이영조
이영조 시장경제와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지배블록의 변화는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사회집단의 등장과 성장을 전제로 한다. 이 점에서 산업화가 비교적 일찍 시작된 아르헨티나에서 포퓰리즘이 제일 먼저 자라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수이긴 하나 산업부르주아지가 등장했고 전문직 종사자도 늘어났고 관리직 등 중간층도 증가했다. 산업노동자 또한 크게 늘어났다. 이 가운데 다수는 아나코신디칼리즘(무정부주의적 노조운동)의 영향이 컸던 남부 유럽에서 온 이민 노동자들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포퓰리즘의 길을 연 것은 이폴리토 이리고엔(Hipolito Yrigoyen)과 그가 1890년대 초에 만든 급진시민동맹(Union Civica Radical· UCR)이었다. 초기 UCR은 이런저런 이유로 정치과정과 정책과정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던 상류층이 주도했다.

부패하고 폐쇄적인 기성정치체제를 종식시키겠다고 공언한 UCR은 여러 차례 '급진적' 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혁명적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하려는 시도가 거듭 실패하자 도시,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간계급에 호소해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1905년 이후에는 대중운동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1910년에 이르면 지배엘리트의 일각에서는 UCR과 그 중간계급 추종자들을 체제 내로 편입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첫째, 이들 개혁 성향의 엘리트들은 UCR과 그 지지세력을 '체제수용적 반대세력(loyal opposition)'으로 끌어들이는 편이 '반체제적 반대세력(disloyal opposition)'으로 내버려 두는 것보다 체제에 덜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다. 둘째, 이들은 또 전통적 아르헨티나 사회에 대한 UCR과 중간계급의 도전은 확산일로의 무정부주의적 노동운동에 비하면 미미하다고 여겼다.

1912년 이들 개혁 성향 엘리트들은 로케 사엔스 페냐 대통령의 주도하에 모든 성인 남자에 투표권을 부여하는 개혁조치를 단행, 191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리고엔이 집권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UCR 정부의 각료 인선과 경제 정책은 지도층 인사들의 '귀족적' 출신배경을 반영하여 그 이전과 정부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 가지 중요 정책을 통해 도시 중간계급과의 연대를 확실히 다졌다.

첫째, 정부의 시혜체계를 확대했다. 둘째, 정부지출을 확대해 공무원의 규모를 늘리는 등 중간계급에게 공공부문의 일자리를 공급했다. 셋째, 지방의 중앙(부에노스아이레스)에 대한 물자공여를 확대함으로써 도시소비자들의 이익을 증진시켰다. 넷째, 일련의 대학개혁을 통해 중간계급의 대학교육에 대한 접근을 확대시켰다.

주목할 것은 노동정책이었다. 1916년 집권 이전 UCR은 '모든 민중'의 이익을 증진하고 '사회주의 유물론'을 배격한다는 선언적 천명 외에 이른바 '사회문제(cuestion social)'에 대해 분명한 입장이 없었다. 하지만 이전 보수 정권이 사회 즉 노동문제를 '경찰'의 문제로 다루었던 것과는 달리, 이리고엔 정부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수용하는 '공평한' 노동정책을 펼치려고 시도했다. 이리고엔의 친노동주의(obrerismo) 정책은 노동자들을 UCR의 지지층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철저히 계산된 선거전략이었다.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사회당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표를 동원하는 데 친노동주의 정책이 이용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리고엔은 1916년에서 1919년 사이에 여러 차례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했다. 이에 힘입어 노동자들의 활동과 조직화가 크게 증가했다.

그 결과 1920년에는 조직노동자의 숫자가 70만에 이르렀다. 이 기록은 훗날 페론(Juan Peron)이 등장해서 노동자들을 조직화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자의 조직화와 동원은 UCR 내부에 균열을 야기했다. 중간계급과 상층계급은 정부가 노동자들의 고삐 풀린 호전성에 굴복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정부가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스스로 반노동 민병대를 조직해 파업을 분쇄하는 일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노동자와 민병대의 충돌이 유혈사태로 발전한 1919년 1월의 '비극적 일주일(Semana Tragica)' 이후 이리고엔은 친노동 정책으로부터 상당히 후퇴했다. 노동자 지지의 동원은 시혜와 자선을 베푸는 데 대체로 한정되고 파업은 1916년 이전과 마찬가지로 경찰의 몫이 되었다.

이리고엔 정부 노동정책의 우여곡절은 연합의 다계급성 때문에 노동 동원에 일정한 한계가 주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이리고엔주의는 훗날 남미의 포퓰리즘 정권에서 보이는 특징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리고엔주의는 농촌과두제에 대항한 도시부문의 다계급연합으로, 내부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모두 만족시킬 정부의 시혜정책을 필요로 했다.

'민중'의 이름을 내세웠지만 그 민중이 누군지 분명치 않았고 연합의 다수를 점했던 조직노동이 주도세력도 아니었다. 노동은 '통제된 동원'의 대상이었다.

각종 시혜로 동원은 하지만 연합 내부의 다른 세력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정한 제약이 가해졌다. 포퓰리즘이 페론주의, 바르가스주의, 차베스주의 등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 개인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UCR 정권은 1930년 쿠데타로 막을 내리지만 선거정치가 본격적으로 부활하는 1946년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은 페로니즘이란 이름으로 더욱 강력하게 부활한다.

이영조 (시장경제와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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