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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과 도시국가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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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11. 17. 17:44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17회>
송재윤1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 문명과 국가, 닭과 달걀의 관계

기원전 5000~6000년경 4대 하곡(河谷, river-valley) 문명이 발생할 무렵, 범람하는 강변으로 늘어선 비옥한 땅으로 인구가 조밀하게 밀집되면서 관료적 행정력을 갖춘 정부가 생겨났다. 고대의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이집트의 나일강, 인도의 인더스강, 중국의 황하 유역에서 발생한 문명은 모두 국가를 형성했다.

국가의 출현은 문명의 본질적 특징이다. 문명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국가가 생겨나지 않았고, 국가가 없이는 문명이 존속할 수 없었다. 지구인의 역사에서 문명의 발흥은 정치적 삶(political life)의 시작이었다. 물론 야만과 문명의 차이를 칼로 무 자르듯 단번에 딱 잘라서 볼 수는 없다. 문명의 발생이 장시간에 걸친 점진적 과정이었듯 국가의 형성도 여러 지역에서 다채로운 방식으로 지그재그의 수단계 나선형 발전 궤도를 밟아갔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친족 중심의 마을(village)이 생겨났고, 여러 마을이 합쳐지면서 씨족 중심의 부족사회(tribal society)가 이뤄졌다. 여러 지역에서 부족사회는 수천 년 안정적으로 존속되었지만, 식량 생산이 늘면서 인구가 조밀해지자 전통적 부족사회는 점차 합리적 규칙과 효율적 제도를 갖춘 군장국가(chiefdom)로 발전해 갔다.
군장국가는 머잖아 더 강력한 권력과 제도를 갖춘 도시국가(city-state)로 나아갔고, 강력한 정치권력이 출현하여 다수의 도시국가를 군사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대규모의 영토 국가(regional state)가 형성되었으며, 영토 국가들 사이의 대규모 전쟁은 결국 제국적 통합(imperial integration)이 달성됐다. 도시국가의 출현에서 제국의 형성까지 여러 지역의 지구인들은 군사적 대립을 거치면서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널리 문명을 보급하고 확장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의 도시국가들

역사학적으로 확인되는 최고(最古)의 도시국가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겨났다. 튀르키예에서 발원하여 2800㎞를 굽이치는 유프라테스강과 시리아 1900㎞를 내달리는 티그리스강이 만나 페르시아만으로 빠져들기 직전의 비옥한 토양이다. 두 강 사이 섬처럼 들어선 이 땅의 이름이 수메르(Sumer)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엔 강수량이 적지만, 이 두 강 덕분에 수량이 풍부하다. 이 두 강 사이에 운하를 뚫기만 하면 쉽게 주변에 큰 저수지를 만들고, 보리밭이나 밀밭으로 물을 댈 수 있었다.

작은 규모의 관개(irrigation) 시설은 기원전 6000년부터 시작됐다. 기원전 6000년에서 5000년에 사이에 이미 수메르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거주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서 이 땅으로 옮겨왔을 가능성도 크다. 기원전 5000년쯤 되면 수메르 지방에는 정교한 수로가 거미줄처럼 들어섰다. 두 강 사이의 땅에서 관개 수로가 건설되자 비약적인 식량 증산이 이뤄졌고, 그 결과 인구가 급증했다. 식량이 남아돌면서 영아 생존율은 오르고 고령층의 사망률은 떨어져 자체적으로도 인구가 증가했지만, 인근 지역에서도 많은 인구가 몰려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식량 증산은 경제적 잉여를 낳아 결국 원거리 교역까지 촉진하기 때문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계단식 피라미드 지구라트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 우르(Ur)에 건설된 계단식 피라미드 지구라트. 위키피디아.
기원전 4000년경 수메르 지역에는 지금껏 알려지기론 가장 오래된 도시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기원전 3000년에 이르면 수메르 지역의 인구는 10만을 넘어섰다고 추정된다. 수메르의 비옥한 땅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대부분 셈어를 쓰는 아카드(Akkad), 아람(Aram), 히브리(Hebrew), 페니키아(Phoenicia)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아라비아나 시리아의 사막에서 남서쪽으로 이주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옮겨간 유목민들이었는데, 수메르 사람들과 결혼하여 수메르 문화에 동화되었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기원전 3200년에서 2350년까지 거의 1000년에 걸쳐서 수메르에는 열 개가 넘는 도시들이 생겨났다. 북단에 들어선 키쉬(Kish)를 빼면 나머지는 거의 모두 남동쪽 절반에 모여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가 바로 지난 회 살펴봤던 '길가메시 서사시'의 역사적 배경 우루크(Uruk)였다. 오늘날 지도에서 우루크는 유프라테스강 하류인 오늘날의 이라크 무탄나주(州)에 놓여 있다.

신석기 주거지와는 달리 고대의 도시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넓은 개활지에 둘러싸인 지역 경제의 허브였다. 인근 지역은 물론 원거리 상인들까지 몰려들면서 이 도시들은 지역 경제의 허브가 되었다. 이 도시들은 경제적 풍요 위에서 주변 지역을 통합하는 종교적·문화적 구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도시의 신전에서 성직자들이 종교적 의식을 주재했고, 정부의 서기들은 문자 기록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지식 문화를 발전시켰다. 경제적 허브로서의 도시는 종교적 성지이면서 문화적 센터가 되었다. 도시에 생겨난 정부는 넓은 개활지에 들어선 농촌에서 세금을 징수하여 국가 재원을 확충할 수 있었다. 도시국가의 정부는 성곽 안의 도시에서만 행정력을 발휘한 게 아니라 도시를 둘러싼 광활한 농촌 지역에까지 지배했다는 얘기다.

◇ 계단식 피라미드 지구라트와 국가의 위용

어느 사회나 정부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고, 안으로 공공의 토목사업을 추진하는 것이다. 수메르 지역 여러 도시가 공동으로 참여했던 대규모 토목공사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대규모 농지를 경작하고 큰 규모의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관개 시스템의 구축이 필수적이었다. 인구 증가에 따라서 수메르인은 다수의 저수지와 운하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수천 시간의 조직적 노동력이 투입돼야 하는 이러한 대규모 공사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정부의 역할이 없이는 달성될 수 없었다. 공사가 끝난 후에 수리 시설을 관리하기 위해선 정부의 역할이 더없이 중요했다. 수자원을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은 물론, 물을 끼고 벌어지는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선 정부의 권위가 필요했다.

수메르 지역 우루크의 고고학 발굴 현장. 위키피디아.
수메르 지역 우루크의 고고학 발굴 현장. 위키피디아.
아울러 수메르의 궁중, 신전, 성곽 등의 흔적은 당시의 정부가 인근 지역 노동력까지 조직적으로 징발하여 효율적으로 사역(使役)했음을 잘 보여 준다. 우루크에는 3200년 전에 대규모의 계단식 피라미드 지구라트(Ziggurat)가 건설되었다. 풍요의 신(神) 이난나(Inanna)를 섬기는 신전도 세워졌다. 한 고고학자의 계산에 따르면, 고대 국가의 기술력으로 그 정도 규모의 구조물을 완성하기 위해선 1만5000명의 노동력이 매일 10시간씩 5년간 투입해야만 한다.

메소포타미아는 천연의 요새와는 거리가 먼 평지로 이뤄져 있었다. 수메르 도시들에 부가 축적되면서 외부에서 다양한 족속들의 침략이 이어졌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선 방어벽을 구축하고 군대를 조직해야만 했다. 병사를 징집하여 훈련하고 무장시켜 도시 방위를 맡기려면 당연히 강력한 정부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여러 지역의 유력자들이 모여서 느슨한 연합체를 이루고서 공동의 위기에 대한 대책을 모색했지만, 점점 심해지는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려면 강력한 군주의 등장이 불가피해졌다. 기원전 3000년 정도가 되면 수메르의 여러 도시국가에서 군주정이 출현했다. 도시국가의 연정 체제가 군주정으로 넘어갔다. 그 결과 기원전 2334년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의 도시국가들을 병합한 아카드(Akkad) 제국이 출현했다.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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