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츠 정부, 철강·통신, 보호무역주의..공공조달서 '유럽산 우선'
전문가, 탈중국 요구...정부, 미·중 사이 전략적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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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간 독일 경제의 번영을 이끌었던 '자유무역 중심' 정책에서 벗어나, 자국 산업을 지키기 위한 '보호주의적 조치'로 선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 독일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와 사상 최대의 무역적자...기계 팔고 소비재 사던 '공생' 붕괴
WSJ은 최근 20년간 독일은 중국이 전 세계에 수출할 소비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기계류를 공급하면서 양국이 막대한 이익을 얻는 천생연분과 같은(couple made in heaven) 경제 동반자였으나 이제 중국은 더 이상 독일이 필요로 하지 않고, 독일은 이 관계를 끝내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중국에 대한 독일의 관계 냉각은 한동안 진행됐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중국에 대한 고율 관세정책으로 화학제품에서 자동차 부품에 이르기까지 값싼 중국산 제품들이 유럽으로 밀려들기 시작하면서 더 악화했다.
독일 경제의 엔진인 제조업은 이미 경고등이 켜진 상태다. 독일 제조업 생산량은 정점을 찍었던 2017년 이후 14%나 감소했다. 산업 공동화 우려 속에 2019년 이후 산업 부문 일자리의 거의 5%가 사라졌다. 특히 자동차 산업에서는 약 13%의 일자리가 증발했다.
경제 데이터는 이러한 독일 제조업의 침체가 주로 중국에 대한 경쟁력 약화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 싱크탱크 로디움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4년 사이 독일은 발전 설비 및 기계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중국에 내줬다. 화학 및 자동차 산업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전기장비 시장에서는 이미 중국에 추월당했다.
특히 독일은 올해 사상 처음으로 중국에서 수입하는 자본재(Capital goods)가 수출을 초과하는 역전 현상을 겪었다. 독일 경제연구소(IW)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중국산 수동 변속기 수입량은 거의 3배 급증했지만, 독일 자동차업체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2년 만에 절반에서 3분의 1로 급락했다.
독일의 중국 수출액은 2019년 이후 4분의 1 감소한 반면, 수입은 급증했다. 그 결과, 올해 독일의 대중국 상품·서비스 무역적자는 사상 최대인 880억유로(약 1020억달러·143조원)를 기록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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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지난달 정부가 중국 경쟁사들로부터 국내 철강업체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했고, 자신이 새로 설립한 국가안보위원회 첫 회의에서 중국이 여러 핵심 광물을 장악함으로써 발생하는 전략적 위험을 논의했다고 WSJ은 전했다.
아울러 메르츠 정부는 모바일 데이터 네트워크 내 중국산 부품 사용 금지를 강화했으며 공공 입찰에 '유럽산 구매(Buy European)' 조항을 도입하는 데 대해 지지를 시사했다.
독일 산업계도 정부의 기조에 발을 맞추고 있다. 독일 기계공업협회(VDMA)의 올리베르 리히트베르크 무역 부문장은 "우리는 여전히 자유무역주의자이지만, 불공정한 무역 정책을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며 "중국이 공정하게 경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책은행 독일재건은행(KfW)의 디르크 슈마허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유럽의 제조 역량을 유지하기엔 혁신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며 "우리는 앞으로 중국에서 어떤 제품을 수입하고, 어떤 제품을 자국에서 계속 생산할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에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무역 장벽을 세우는 방안도 포함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요한 바데풀 독일 외무장관이 지난 8일 중국 방문 중 "유럽 기업이 중국 시장과 자원에 대해 더 나은 접근권을 가져야 한다"고 압박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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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과제는 만만치 않다. 지난해 '독일과 중국,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가 자유·번영·안보를 어떻게 훼손하는가'라는 책을 쓴 안드레아스 풀다 영국 노팅엄대 정치학 교수는 "변화된 어조가 상당히 놀랍다"면서도 "위험 완화(Derisking)와 리쇼어링(Reshoring·기업의 국내 복귀)을 장려할 실제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로디엄그룹의 중국 전문가 노아 바킨 애널리스트는 유럽이 중국의 투자가 유럽 내 기술과 일자리 측면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 중국에 시장을 닫을 의향이 있는지가 관건이라며 독일이 장기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달래는 단기적 이익을 선호하는 '상하이(上海) 증후군'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독일 정부가 예측 불가능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대비책(hedge)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일어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외교 전문가인 노르베르트 뢰트겐 독일 기독민주당(CDU) 의원은 "우리는 중국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면서도, "미국이 우리를 실망시킨다면, 이는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