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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조 박사의 정치경제 까톡] 외채 통한 탈출 시도와 외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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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11. 19. 18:03

이영조
이영조 전 한국라틴아메리카학회 회장
◇외채 통한 탈출

군정의 경제문제는 1차 오일쇼크 후 더 심각해졌다. 국제수지는 악화했고 성장은 둔화했다. 구조조정이 필요했지만, 정당성이 취약한 군부정권들로서는 국민들로 하여금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는 구조조정을 강행할 정치적 의지나 지지가 없었다. 이런 진퇴양난에서 중남미의 군사정권이 찾아낸 탈출구는 외채였다. 구조조정은 미룬 채 외채를 들여와 성장 동력을 키우려고 시도했다.

당시 국제금융시장에서 싼 이자로 빌릴 수 있는 돈은 무궁무진했다. 석유가격이 하루아침에 4배 폭등하는 바람에 막대한 외화가 석유수출국으로 흘러 들어갔고 이 '석유달러(petrodollars)'는 구미의 은행에 예치되었다. 당시 구미 은행들의 최대과제는 이 석유달러를 회전시키는 것이었다. 대출신디케이트, 변동이자율, 일괄부도조항(cross-default clause) 등 위험분산장치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한 구미의 은행들은 무모할 정도로 대출에 나섰고 중남미 정부도 필요 이상으로 외채를 끌어 썼다.

문제는 많은 외채를 들여왔지만, 성장률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수익성을 제대로 따지지 않고 무분별하게 투자한 탓이 크지만 일부 부패한 공직자들이 외채의 일부를 해외로 빼돌린 탓도 있었다. 국제수지 또한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브라질처럼 경상수지가 흑자였던 국가조차 흑자 규모는 외채의 원리금 상환에도 부족했다. 원리금 상환을 위해 새로운 외채를 또 끌어들여야 해서 외채는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2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중남미의 외채 상황은 '심판의 날'을 맞았다. 2차 오일쇼크 후 구미 선진국들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긴축 통화정책을 펴기 시작하자 국제금리가 인상되었다. 이자율의 급등으로 중남미 국가의 외채상환부담도 폭증했다. 지불불능 상태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외채 위기와 경제 주권의 상실

마침내 1982년 8월 멕시코가 외채에 대해 이자지불 중단을 선언했다. 서방 은행들은 즉각 채무국들에 대한 추가대출을 중단했다. 사실상 모든 채무국들이 연체 상태에 빠지면서 국제금융질서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외채 위기가 발발할 당시 채권은행도 채무국도 IMF도 채권은행의 정부도 이런 규모의 금융위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은행들의 파산 도미노를 우려한 미국과 IMF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협상이 진행되기는 했으나 타결은 쉽지 않았다.

외채협상의 주된 이슈는 기존채무에 대한 상환시한의 연장과 당장의 자금경색을 해결할 신규대출의 제공이었다. 하지만 큰 은행과 작은 은행, 미국계 은행과 유럽계 은행의 이해가 엇갈렸다. 중남미에 많이 노출된 대규모 미국계 은행들은 상당한 양보를 할 용의가 있었지만 비교적 노출이 적은 소규모 유럽계 은행들은 신규대출의 제공에 난색을 표했다. 표준적인 협상절차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점도 협상을 어렵게 했다.

국가별로 협상이 진행되면서 서서히 절차가 자리잡았지만 협상 자체가 쉬워지지는 않았다. 채권은행들은 채무국이 IMF의 구조조정조건에 합의하고 IMF가 급전을 대출할 경우에만 신규자금을 제공하겠다는 입장이었고 IMF는 채권은행이 신규대출을 약속해야만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채권은행, 채무국, IMF 3자 사이에 동시에 합의가 이뤄져야 협상이 타결될 수 있었다.

게다가 외채위기로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이제 막 다시 민주화된 채무국들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IMF나 채권은행이 요구하는 조건들에 쉽게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협상이 어렵사리 타결되어도 조건들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협상결과가 파기되고 다시 협상이 벌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하지만 10여 년간 외채협상이 단속적으로 계속되는 과정에서 중남미 국가들은 결국에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로 불리는 신자유주의적 개혁프로그램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채권은행들이 1980년대 후반 브라질의 모라토리움에 대응해 대손충당금을 크게 늘림으로써 협상력이 제고된 데 기인한다.

1987년 봄 브라질은 일부 채무의 고율 이자율을 인하하기 위해 이자지불을 중단하는 한편 같은 처지의 다른 채무국들과 카르텔을 형성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대해 브라질의 최대 채권은행인 시티은행은 양보할 경우 나쁜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강경하게 대응했다. 브라질 채권을 장부상 손절하고 대손충당금을 크게 늘려 추가적인 부실에 대비하는 한편 브라질에 대한 모든 여신을 차단했다. 동시에 다른 채무국과는 유리한 조건으로 외채협상을 타결함으로써 채무국 카르텔의 형성을 막았다. 그러자 다른 채권은행들도 시티은행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모든 여신이 차단된 상태에서 모든 무역결제를 현금으로 해야 하는 궁지에 몰린 브라질은 1년도 되지 않아 백기를 들었다. 이 사건은 채권은행들이 외채협상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 최대채무국인 브라질이 모라토리움을 선언해도 우려했던 파산도미노나 국제금융질서 붕괴는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채권국, 특히 미국 정부와 그 영향하에 있는 IMF가 채무국을 위해 개입하기보다는 채권은행과 채무국의 양자협상에 외채문제를 맡기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하게 만들었다.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 중남미의 채무국들은 IMF와 채권은행이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수용함으로써 경제정책상의 자율성을 상당 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영조 (전 한국라틴아메리카학회 회장)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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