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한 줄기 바람
삶과 죽음 사이, 사랑과 후회의 지층을 더듬는 부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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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퍽 단순한 장면에서 시작한다. 외곽에 위치한 아파트의 거실.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그 공간에서, 손현주(이종무 분)는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고, 아내 양꽃님(임정은 분)은 평소처럼 그를 맞는다. 그러나 곧이어 전해지는 꽃님의 한 마디, "당신 밥 차려주고 나 저기서 뛰어내릴 거야." 이 말은 그저 충격을 던지는 선언이 아니라, 이후 극 중 계속해서 등장할 수많은 질문들-죽고 싶다는 말의 진심은 무엇인가, 살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누군가의 상실을 정말로 함께 살아줄 수 있는가-를 끌고 오는 시발점이 된다.
'그 봄, 한낮의 우울'은 기본적으로 '삶과 죽음'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탁월한 이유는 그것이 철학적 성찰이나 감정 과잉에 머무르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인 디테일을 통해 우리의 삶 그 자체를 건드린다는 데 있다. 대사는 숨 쉬듯 자연스럽고, 배우들의 연기는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살아 있다. 김상진 작가의 대본은 '살림'이라는 단어가 가진 물리적 노동과 정신적 소외, 그리고 여성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한 치의 미화 없이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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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님의 고백은 그저 개인적인 슬픔이 아니라, 은별이라는 아이를 잃은 부모로서 겪는 깊은 상실이자, 그 상실을 말할 언어조차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절규다. 작품 후반, 죽은 딸 은별이 산소호흡기를 끌고 등장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무대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의 심장을 옥죈다. 유령이자 환상인 그 존재는, 한 가족에게 남은 '기억의 실체'이자 '벗어날 수 없는 과거'다. 꽃님과 현주는 은별을 보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고, 그 상실은 이 부부의 대화 하나하나에 새겨진 주름처럼 남아 있다.
극단 꿈의동지의 연출가 박지호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폭력"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무대 위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자살하려는 아내를 '막는' 대신 함께 말다툼하고, 외면하고, 때론 농담으로 피해가는 남편 손현주는 어쩌면 사회의 단면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 '가장'이라는 위치, 그 책임을 짊어진 채 살았지만 정작 아내의 고통을 몰랐던 사람. 현주는 우리 모두가 아닌가-누군가의 고통을 진심으로 보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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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은 배우는 양꽃님이라는 인물을 통해 "살림하는 여성의 절망"과 "잃어버린 어머니로서의 상실"을 모두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감정의 결이 풍부하면서도 절제된 연기, 대사의 타이밍, 그리고 무대 공간을 장악하는 에너지는 이 작품의 중심을 흔들림 없이 지탱한다. 이종무 역시 극 전체를 감싸는 남편으로서, 때론 미성숙하고 이기적이지만 결국엔 사랑을 향해 나아가려는 남자의 심리를 진정성 있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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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작품은 말한다. "죽겠다는 생각은 누구나 해. 하지만 누구나 당신 결론은 아니야."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닌, 어떤 이들에게는 유일하게 남겨진 의사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앞에서 함께 울고, 웃고, 미워하고, 떠안고, 결국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봄, 한낮의 우울'에 담겨 있다.
봄볕 아래 잘 마른 빨래처럼, 이 연극은 말없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당신은 지금 괜찮냐"고. 그리고 우리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말해도 되는 곳이, 바로 이 무대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