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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기자의 대학로 오디세이] 말하지 못한 슬픔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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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3. 31. 08:29

연극 '그 봄, 한낮의 우울'
상실과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한 줄기 바람
삶과 죽음 사이, 사랑과 후회의 지층을 더듬는 부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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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를 맞은 무죽페스티벌의 두번째 작품, 극단 꿈의동지의 '그 봄, 한낮의 우울' 공연 장면. / 사진 극단 꿈의동지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대학로 연극 축제 '무죽 페스티벌'이 벌써 11회를 맞았다. 무대에서 죽을 각오로 작품을 올리겠다는 뜻을 품은 이 축제는 해가 거듭될수록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로 관객들을 찾아온다. 올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극단 신인류의 '먼데이 PM5'로 포문을 연 2025년의 무죽은, 극단 꿈의동지의 작품 '그 봄, 한낮의 우울'을 통해 한층 더 깊은 곳을 건드린다. 그리고 이 작품은, 아마도 그 어떤 말보다 조용히, 그러나 가장 강력하게, 우리를 무너뜨린다.

극은 퍽 단순한 장면에서 시작한다. 외곽에 위치한 아파트의 거실.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그 공간에서, 손현주(이종무 분)는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고, 아내 양꽃님(임정은 분)은 평소처럼 그를 맞는다. 그러나 곧이어 전해지는 꽃님의 한 마디, "당신 밥 차려주고 나 저기서 뛰어내릴 거야." 이 말은 그저 충격을 던지는 선언이 아니라, 이후 극 중 계속해서 등장할 수많은 질문들-죽고 싶다는 말의 진심은 무엇인가, 살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누군가의 상실을 정말로 함께 살아줄 수 있는가-를 끌고 오는 시발점이 된다.

'그 봄, 한낮의 우울'은 기본적으로 '삶과 죽음'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탁월한 이유는 그것이 철학적 성찰이나 감정 과잉에 머무르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인 디테일을 통해 우리의 삶 그 자체를 건드린다는 데 있다. 대사는 숨 쉬듯 자연스럽고, 배우들의 연기는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살아 있다. 김상진 작가의 대본은 '살림'이라는 단어가 가진 물리적 노동과 정신적 소외, 그리고 여성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한 치의 미화 없이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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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를 맞은 무죽페스티벌의 두번째 작품, 극단 꿈의동지의 '그 봄, 한낮의 우울' 공연 장면. / 사진 극단 꿈의동지
양꽃님은 단지 절망에 빠진 여성이 아니다. 그는 주부로, 엄마로, 아내로 살아오며 고통과 무기력, 상실을 너무 오래 견뎌온 사람이다. 그가 말하는 '죽고 싶다'는 단순한 좌절이나 감정 폭발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보려다 실패한 사람"의 고백이자, "살아야만 했던 이유들이 무너졌을 때에도 버텨야 하느냐"는, 사회에 대한 반문이다. 더는 누군가를 위해 살 수 없을 때, 그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꽃님의 고백은 그저 개인적인 슬픔이 아니라, 은별이라는 아이를 잃은 부모로서 겪는 깊은 상실이자, 그 상실을 말할 언어조차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절규다. 작품 후반, 죽은 딸 은별이 산소호흡기를 끌고 등장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무대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의 심장을 옥죈다. 유령이자 환상인 그 존재는, 한 가족에게 남은 '기억의 실체'이자 '벗어날 수 없는 과거'다. 꽃님과 현주는 은별을 보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고, 그 상실은 이 부부의 대화 하나하나에 새겨진 주름처럼 남아 있다.

극단 꿈의동지의 연출가 박지호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폭력"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무대 위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자살하려는 아내를 '막는' 대신 함께 말다툼하고, 외면하고, 때론 농담으로 피해가는 남편 손현주는 어쩌면 사회의 단면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 '가장'이라는 위치, 그 책임을 짊어진 채 살았지만 정작 아내의 고통을 몰랐던 사람. 현주는 우리 모두가 아닌가-누군가의 고통을 진심으로 보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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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를 맞은 무죽페스티벌의 두번째 작품, 극단 꿈의동지의 '그 봄, 한낮의 우울' 공연 장면. / 사진 극단 꿈의동지
연극의 연출은 극도로 사실적이다. 무대 위 공간은 마치 실제 가정집처럼 촘촘히 짜여 있으며, 냄비와 빨래, 강아지 소리, 텔레비전, 초코케이크 등 일상의 소품들이 공연 내내 반복해서 사용된다. 그 평범한 도구들이 때론 무대 위 장치로, 때론 정서적 폭발의 계기로 기능한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꽃님이 딸 은별을 안고 베란다로 향하며, 물속에 잠수하듯 무중력 걸음으로 향하는 연출은 섬뜩할 정도로 아름답고 슬프다. 그 순간 관객은 '죽음'이라는 선택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임정은 배우는 양꽃님이라는 인물을 통해 "살림하는 여성의 절망"과 "잃어버린 어머니로서의 상실"을 모두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감정의 결이 풍부하면서도 절제된 연기, 대사의 타이밍, 그리고 무대 공간을 장악하는 에너지는 이 작품의 중심을 흔들림 없이 지탱한다. 이종무 역시 극 전체를 감싸는 남편으로서, 때론 미성숙하고 이기적이지만 결국엔 사랑을 향해 나아가려는 남자의 심리를 진정성 있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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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를 맞은 무죽페스티벌의 두번째 작품, 극단 꿈의동지의 '그 봄, 한낮의 우울' 공연 장면. / 사진 극단 꿈의동지
'그 봄, 한낮의 우울'은 극단 꿈의동지의 방향성을 분명히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들은 무대 위에서 '사회적 기억'을 환기시키고,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며, 결코 단순화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이 연극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이 무대 바깥으로 번져가게 만든다. 관객은 작품을 보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 삶을, 나는 왜 지속하고 있는가?'

결국 이 작품은 말한다. "죽겠다는 생각은 누구나 해. 하지만 누구나 당신 결론은 아니야."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닌, 어떤 이들에게는 유일하게 남겨진 의사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앞에서 함께 울고, 웃고, 미워하고, 떠안고, 결국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봄, 한낮의 우울'에 담겨 있다.

봄볕 아래 잘 마른 빨래처럼, 이 연극은 말없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당신은 지금 괜찮냐"고. 그리고 우리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말해도 되는 곳이, 바로 이 무대라는 것을.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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